사계선생 연보

사계선생 연보



1548 ~ 1566(명종)

1548년(명종 3)서울 정동(서소문동 대법원 자리였던 곳)에서 출생함
아버지는 대사헌을 지낸 황광 김계휘이고, 어머니는 평산신씨이다.
1557년 10세(명종 12)구봉 송익필의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움
1558년 11세(명종 13)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외직으로 부임하여 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
1560년 13세(명종 15)모친 3년상을 마치고, 구봉 송익필을 찾아가 사서[논어, 맹자, 대학, 중용]와 [근사록]을 배움
1561년 14세(명종 16)할아버지 임지인 지리로 따라감
12월 -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와 함께 연산으로 돌아와 함께 거처함
1566 19세(명종 21)6월-돈암서원 항례의절을 만듬
첫째부인 창녕 조씨를 맞아 혼인함


1567 ~ 1605(선조)

1567년 20세(선조 원년)6월 - 아버지와 절친한 교우인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함
큰 아들 김은이 태어남
보령에 가서 토정 이지함을 찾아 뵘
1574년 27세(선조 7)둘째아들 김집이 태어남
1575년 28세(선조 8)
평안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서 기거함
1578년 31세(선조 11)
학행(학문과 덕행이 높은 인재)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됨
1580년 33세(선조 13)
셋째아들 김반이 태어남
경기도 파주로 우계 성혼 선생을 찾아뵘
1581년 34세(선조 14)
가을에 중국 북경에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따라 돈녕부 참봉에 임명되어 수행함
1582년 35세(선조 15)
4월 - 귀국함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상을 지냄
1583년 36세(선조 16)
[상례비요]를 완성함
1584년 37세(선조 17)
부친상을 마침.
순릉 창봉, 평시서 봉사, 활인서, 사포서, 사옹원 등의 별제와 봉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음
1586년 38세(선조 19)
첫째 부인의 상을 당함
1588년 41세(선조 21)
둘째부인 순천김씨를 맞이함
1591년 44세(선조 24)
동몽교관(41세), 동례원 인의(43세)를 거쳐, 정산현감에 부임함
1592년 45세(선조 25)
4월 - 왜적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남.
5월 - 장자 가족이 왜병에게 몰살당하고, 동생(김연손)이 전사함
1596년 49세(선조 29)
정산현감을 사임하고 연산 집으로 돌아옴
호조정랑에 임명됨
1597년 50세(선조 30)
왜군이 다시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남.
봄에 호남에서 군량을 조달하라는 명을 받고 겨울에 일을 마침.
겨울에 황해도 황봉에서 교육에 몰두
12월 - 단양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음
1598년 51세(선조 31)
4월 - 군자감 첨정과 호조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가을에 [근사록해의] 완성
1599년 52세(선조 32)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남
1월 - 양근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음
2월 - 익위사 익위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군자감첨정에 임명되어 취직함
6월 - 안성군수에 취임함
9월 - [가례집람] 완성
1601년 54세(선조 34)
9월 - 종친부 전부(典簿)에 제수되고 [주역]의 구결(口訣) 교정에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음
1602년 55세(선조 35)
봄에 벼슬을 그만두고 연산으로 돌아와 사계고택을 지음
1603년 56세(선조 36)
5월 - 익산군수에 취임함
1604년 57세(선조 37)
10월 - 관직을 그만두고 연산으로 다시 돌아옴


1609 ~ 1618(광해)

1609년 62세(광해 1)5월 - 익위사 익위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음
8월 - 화양부사에 임명되어 여러 번 사양함
11월 - 화양부사에 부임함
1610년 63세(광해 2)
철원부사로 부임함
1613년 66세(광해 5)
철원부사로 재직하다가,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옥사)에 이복동생인 경손과 평손이 연루되어 옥사하자, 김장생도 연좌(친지의 죄로 죄에 연루됨)되어 처벌 위기에 처했으나 무혐의되어 풀려나 해직하고 연산으로 돌아옴. 이후 연산에서 10여년간 학문과 교육에 전념함
1618년 71세(광해 10)
[경서변의]완성


1623 ~ 1631(인조)

1623년 76세(인조 1)3월 -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즉위함.
이귀, 최명길 등 반정의 주역들에게 글을 보내어 덕으로 정치하라고 충고함. 반정의 주역들이 산림처사로 추천하여, 76세의 나이에 장령에 임명됨. 곧이어 사업과 원자보도(세자의 스승)의 임무를 겸하여 세자를 가르치다가 다시 낙향
1624년 77세(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공주로 피신해 온 인조를 맞이하고, 난이 평정되자 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감.
경연(임금에게 강하는 자리)에 입시하여 강연함.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면서 중요한 정치 현안 13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림.
통정대부 공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사직함.
다시 경연에 입시하여 강연하고 세자 강학관을 겸함
1625년 78세(인조 3)
특명으로 가선대부로 승진되고,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됨
경연 특진관으로 임명됨
경연 특진관을 사직함
1626년 79세(인조 4)
다시 서울로 올라가 용양위 행호군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함.
강경에 이이와 성혼을 제향하는 황산서원(현 죽림서원)을 세움.
용양위 부사직에 임명됨
1627년 80세(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남. 양호 호소사로 임명되어 80세의 노구로 충청과 호남 지방의 군사 모집과 군량 수집을 담당하고 공주로 피신한 세자를 호위함.
의병을 모아 세자를 모심.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를 찾아갔다가 연산으로 돌아옴.
황의가 이루어지고 적이 몰려가자 군대를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옴
1628년 81세(인조 6)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함
용양위 부호군을 제수받고 낙향함
1629년 82세(인조 7)
인조가 수차례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음
1630년 83세(인조 8)
가의대부에 오름
가을에 송시열이 찾아와 배움
1631년 84세(인조 9)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군을 정식 국왕으로 추숭하려하자, 강력히 반대함. 고향에서 노환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교육에 열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