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2019년 돈암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기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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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mnews.co.kr/sub_read.html?uid=44513&section=sc36&section2=인터뷰

‘유학=고리타분’ 넘어 유교현대화에도 선봉


 


▲ 돈암서원     © 놀뫼신문

 


민관 합작품인 ‘돈암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기’를 지난호에는 주로 관(官)의 입장에서 기록하였다. “불굴의 투지로 돈암서원 세계문화유산 등극”이라는 제하에 ‘황명선 논산시장과 이배용 위원장의 눈물겨운 3전4기’라는 부제로 시작하였다. 


이번호는 민(民)의 자리다. 돈암서원 김선의 장의가 들려주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개인의 의지가 세계사에도 기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될 성싶다. “저게 과연 될까?”해왔던 주변의 불안감을 일시에 불식시켜준 2019년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날아온 낭보(朗報).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논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한 9개소 ‘한국의 서원’에 ‘세계문화유산’이라는 거대 입석을 승인해주었다. 


한동안 멍했던 논산시내에, 특히 돈암서원 대나무 벽에는 현수막 도배다. 머잖아 논산시 자축 행사도 성대히 열릴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이제부터다. 계룡쪽으로는 사계고택으로의 확장성, 같은 논산의 노성쪽으로는 충청유교문화원과의 벨트화 등 기호유학의 상생 과제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노성 종학당 아래에서 첫 삽을 뜬 충청유교문화원이 민관(民官)의 합작품이듯, 돈암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민·관 쌍두마차가 보조를 맞추어서 이끌어낸 회심작이다. 지금까지 절치부심하면서 유네스코 등재라는 쾌거를 이루어낸 일등공신으로 김선의 돈암서원 장의를 지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차제에, 그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일문 일답으로 들어본다(경어체 생략).



▲     © 놀뫼신문


 


세계유산등재 공식 발표까지 누구보다도 조마조마했겠는데, 처음 얘기부터 거슬러간다면....


 


2011년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9개 서원이 유네스코에 잠정 등록되었고, 나는 그 다음해인 2012년 처음 돈암서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까지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나 다른 세상이라 어리둥절하여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였는데, 김용숭 당시 원장님이 지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서 유네스코 등 대외업무를 내가 맡게 되었다.


기존의 세계유산추진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이미 서원에 대한 역사자료 등 책자가 만들어지고 있던 때였다. 나는 열심히 돈암서원 자료를 공부하며 이곳저곳 회의에 참석하고 지시하는 대로 논산시공무원들과 함께 서원정비사업 등을 수행하면서 유네스코 실사에 대비하였다.


 


2015년 어떤 암초에 걸렸나?


 


2017년 유네스코 등재를 목표로 준비하였었다. 그러나 2015년말 유네스코에서 “한국의 서원이 등재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소식에 스스로 신청을 철회하고 재수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한국의 서원들이 유산구역과 완충구역을 너무 좁게 설정해서 개발의 위협이 염려된다는 지적과, 돈암서원의 이전(移轉)에 대하여 서원의 진정성이 의심된다며 보강 서류를 요구하였다.


나는 서원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전문위원들이 서류를 작성하였기에 그 내용만 열심히 숙지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돈암서원 때문에 유네스코 등재에 걸림돌이 된다 하니 모든 게 내 탓인 양 고민이 시작되었다. 회의에 참석해도 눈치만 보이고 자꾸 의기소침해졌다.


그때 추진단장인 이배용 전 브랜드위원장께서 “모든 서원이 합심해서 난관을 돌파하자”고 하시면서 서원관계자들과 지자체 공무원들이 심기일전,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유네스코실사를 대비하게 되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발표 현장     © 놀뫼신문

 


진정성 문제는 어떻게 돌파하였나?


 


돈암서원은 영남의 서원들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서원에 관한 고증 자료가 부족하고 사진자료 등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영남서원들은 산속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변 자연과 잘 어울리는 멋진 풍광인 반면, 돈암서원 주변은 개발이 이루어져 서원을 찾는 전문위원들과 예비실사자들로부터 여러 지적을 받게 되니 시공무원들과 함께 풀이 죽었다.


그래도 시작을 한 것이니까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실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혹 우리 돈암서원 때문에 다른 서원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데 지장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어떻게든 누가 되지 않게 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서원 한문 자료를 읽고 또 읽고, 기도도 하였다. 어느날 기도중 나는 귀중한 자료를 보고 소중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돈암서원은 1880년에 근처 1.7km 떨어진 곳에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해왔다. 많은 비로 인하여 서원 담장이 차오르고 운영에 지장이 있어서, 단지 그래서 이전했던 것이다. 응도당 건물은 워낙 크고 그 시대 기술로는 이전이 어려워 함께 이전하지 못하다가 1971년도에 비로소 옮겨오게 되었다. “이미 응도당 자리에 양성당이 자리잡고 있어서 원래의 자리로 올 수 없어 진정성이 의심된다”고 하는 것이 그간의 통설이었다. 나는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자료를 발견했나?


 


1854년과 1874년에 논산지역에는 큰비가 왔고 정부에서는 홍수를 선포했다. 지금도 재난구역을 선포하면 세금감면 등 여러 혜택이 주어진다. 당시에도 홍수를 인정해주면 세금을 거둘 수 없기에 홍수를 선포하자면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다. 그런데도 피해가 워낙 크기 때문에 관에서는 홍수를 선포했고, 서원의 장의들은 서원 주변에 방천 사업 등으로 서원을 보호하며 한편으로 서원을 물이 차지 않을 만한 지역으로 옮길 결정을 하게 된다. 그 시대는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에 47개 서원만이 살아남은 때라 관에 지원 요청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우선 사당과 강당 전사청 등 서원의 필수 건축물만 옮기고 사계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응도당(1634)과 돈암서원의 건축 과정을 기록한 돈암서원원정비(1669년)는 그 자리에 두고 떠났었다. 


후에 1883년 사계 선생의 9세손은 양성당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양성당과 응도당을 현판을 바꾸어 이전하는 것은 임시 방편으로 하는 것이다(권도에 의함). 그러나 언젠가 유력자가 나타나서 원래의 모습대로 꽃도 심고 연못도 만들고 서원의 옛 모습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이로 보건대, 부득이 서원을 옮기고 때가 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강점기가 시작되고 서원의 옛 자리에 호남선이 지나가면서 모든 것이 헛되게 된 것을 깨닫고 1925년에 돈암서원원정비를 현 위치로 옮기고 『사계전서』, 『신독재전서』 등을 발간하였다. 1926년 장판각을 건축하고, 나머지 건축물 등을 속속 건축하는 것을 보면서 “천재지변은 나라에서도 다스리기 어려운데 서원의 유학자들이 축대를 쌓고 서원을 옮긴 것이 문제가 된다면 진정 어느 것이 서원의 진정성인가?” 이제는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정면으로 반문할 자신이 생겨났다. 이런 공부로 등재 준비에 더 박차를 기해나갈 수 있었다.


 


건물도 중요하지만 교육은 어떻게 이어갔나?


 


돈암서원은 2014년부터 문화재청의 ‘살아 숨쉬는 향교·서원’ 공모 사업에 선정이 되었다. 이후 6년째 활용사업을 지속하면서 지역의 어린이집 아이부터 성인들까지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 사실을 불시에 인근학교를 방문하여 보고 확인한 유네스코 관계자들은 호평을 아끼지 않았으며, “다른 서원들도 따르라”는 권유문도 남겼다. 우리는 청소년들 눈높이에 맞추어 홈페이지를 제작, 수시로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서원이 옛 것만 고집하고 있으면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항상 하며, 시대에 맞는 교육을 통하여 선조들이 이루고자 하셨던 정신을 이어받고자 오늘도 고민중이다. 


 


사계선생의 영향력에 과장된 요소는 없나?


 


돈암서원은 사계 선생이 살아 계실 때부터 수백 년간 기호지방의 으뜸서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다른 지역의 향교나 서원으로부터 자문을 받으면 친절히 답해주었다.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 선생은 여기에 머무시다가 복직되어서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는데, 임금에게 상소하여 경주의 옥산서원에 사액을 요청해주신 분이다. 그 옥산서원은 이번에 유네스코에 함께 등재된 서원 중 하나이다. 장성의 필암서원에 가면 서원 입구 누각인 확연루 현판을 사계 선생의 제자인 우암 송시열이, 강당인 청절당은 동춘당 송준길이 현판을 써주었는데, 이처럼 돈암서원은 지역을 넓혀갔다. 나는 작년 9월 유네스코 실사 때 각본에는 없지만 중국에서 온 정군 박사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었다. 다른 관계자들로부터 눈총도 받았지만 기호유학의 본산인 돈암서원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눈치 없는 척하며 주저리주저리 읊어댔다. 


 


한국서원의 유네스코 등재는 대한민국의 경사이지만, 이제부터라고 본다. 


 


나부터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이제 돈암서원을 포함한 한국의 9개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되었다. 돌아보면 정말 꿈같은 일이다. 이제 선조들의 뜻을 잘 이해하고 현대에 맞게 서원을 활용해 나가는 일이야말로 서원의 진정성을 회복해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큰 절을 올린다. 



▲ 향시에 참가한 외국 학생들     © 놀뫼신문

 



▲     © 놀뫼신문

 


[대담] 이진영 기자